초원의 집

psc4015.egloos.com

포토로그 마이가든 방명록


메모장



필리핀 엘니도 해외

소수의 다이버들에게만 알려졌던 군도 엘니도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다. 엘니도는 팔라완이라는 작은 섬의 북쪽 끝에 위치한 엘니도 마을 주변과 바쿠닛 군도 지역을 통칭하여 일컫는 지명이다. 작은 마을이었던 엘니도가 여행자의 발길이 본격적으로 닿기 시작한 것은 작은 섬 미니록(Miniloc)과 라겐(Lagen)에 리조트가 들어서면서부터다. 이 두 리조트를 빼면 아직까지도 엘니도는 작은 어촌 마을로,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작은 방갈로 숙소들을 가지고 있는 소박한 작은 마을이다.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리조트의 모습. 엘니도는 오는 길이 힘들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은 청정지역 중 하나다.

 

 

산 넘고 물 건너 들어가는 엘니도

이 작은 섬으로 들어가려면 꽤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여행자들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지만 한 번 들어가기 쉽지 않은 위치 때문에 다행히 섬은 더 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벗어날 수 있어 오히려 청정한 본래의 모습을 여전히 잘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일단 엘니도는 필리핀의 큰 섬인 루손 섬 서쪽에 길쭉하게 뻗어 있는 또 다른 섬 팔라완에 속해 있다. 팔라완은 필리핀에서도 손꼽히는 청정지역으로 내륙은 사람의 발길이 뜸한 열대 밀림으로 뒤덮여 있고, 바다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원시 해변이 대부분이다. 희귀한 동식물의 보고로도 알려져 있어 팔라완은 세계적으로 보호해야 할 귀중한 자연유산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 팔라완의 북쪽에 엘니도 타운이 있다. 엘니도 타운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항공을 이용한다면 마닐라에서 1시간만에 작은 경비행기를 타고 비교적 쉽게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리조트에서 거의 전세기로 운영하기 때문에 그 비용이 만만치 않고, 리조트 투숙객이 아니라면 예약 또한 쉽지 않은 형편. 대다수의 배낭여행자들이 선택하는 것은 역시 항공과 함께 육로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육로를 이용한다면 일단 팔라완 섬의 가장 중심지인 푸에르토 프린세사까지는 배나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푸에르토 프린세사에서 엘니도까지 버스를 이용하는데 보통 6시간 정도의 장거리 이동이 필요하다. 물론 우기에 날씨가 안 좋아 길이 질퍽해지면 몇 시간쯤 지체되는 것은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이렇게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 오게 되는 곳이 바로 엘니도다.

 

운이 좋으면 바다 거북이와 만날 수도 있다.

청정해안이 일품인 스네이크섬의 전경

 

 

어렵게 당도한 엘니도에서 배낭여행자들은 대부분 일주일 이상 머무르며, 천혜의 자연을 마음껏 만끽하고 떠난다. 주로 엘니도 타운에 작은 방갈로 숙소를 잡고, 낮에는 섬 주변에서 수영을 하거나 배를 빌려 인근의 섬들을 돌면서 스노클링과 수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천국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다.

 

 

기암절벽에 둘러싸인 작은 바닷가 마을

엘니도 타운은 아주 작은 마을이어서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가도 다 닿을 정도다. 타운에는 그래도 꽤 여행자들이 드는 편이어서 필리핀 음식을 취급하는 식당들이 대부분이지만, 여행자들을 위한 파스타나 햄버거 등을 파는 식당도 여러 곳 찾을 수 있다. 물론 그 가격은 상당히 순진한 편. 엘니도 타운에는 다이빙 숍도 여럿 있어서 이곳에서 쉽게 다이빙 투어나 스노클링 투어를 예약해서 인근 바다로 나갈 수 있다. 엘니도를 여행하는 가장 좋은 시기는 3, 4월. 이때는 마치 우리나라의 봄처럼 마을을 둘러 싼 기암절벽은 원색의 꽃들로 가득차고, 마을에 많이 있는 캐슈넛 수확철이라 풍요로운 마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9, 10월도 꽃은 다시 찾아와 여행자들을 기쁘게 하는데 오히려 여행 비수기에 속해서 숙박료는 저렴하다. 6월에서 11월까지는 우기로 들어가는데 보통은 낮에 비가 잠깐 쏟아지고 곧 맑아지는 전형적인 동남아시아 스콜을 보여준다.

 

엘니도 마을은 기암적별으로 둘러싸여 있다.

엘니도에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듯한 원시 해변들이 많다.

 

 

다이빙과 스노클링을 즐기기에 최적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엘니도가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건 미니록과 라겐이라는 리조트가 문을 열고 나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작은 섬을 빌려 섬 하나가 리조트인 이 두 곳은 꽤 호사스러운 시설을 갖추고 있고, 인근 자연환경은 다이빙이나 스노클링을 즐기기에도 손색이 없다. 미니록 리조트가 좀 더 먼저 생겼는데 전체적인 분위기는 소박하고 친환경적인 분위기다. 나중에 생긴 라겐 리조트는 신혼여행자들을 겨냥해 좀 더 현대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 두 리조트는 한 회사에서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이 두 곳은 한꺼번에 이용하는 여행자들도 많다. 가족여행자들이나 좀 더 휴향에 가까운 여행을 원하는 여행자들은 엘니도 타운보다는 리조트를 선택하는 경향이 좀 더 선명하다.

 

 

엘니도 즐기기

엘리도의 자연환경은 베트남의 하롱베이나 중국의 계림을 연상시킨다. 바다 한 복판에 불쑥 솟아 있는 기암괴석들이 바위산을 이루고, 그 바위산 사이사이로 원시 해변이 눈부시게 자리잡고 있다. 바다 협곡을 따라 사람들은 스노클링을 하기도 하고 카약을 타고 잔잔한 바다 위를 누비기도 한다. 바다 속은 살아 있는 산호들과 그 사이를 누비는 열대어들이 꽤 다양하게 서식하고 있다. 바다 속을 본격적으로 즐기려면 역시 다이빙이 제격이다. 엘니도 타운의 여행사와 다이빙숍들이나 인근 리조트들은 이 바위섬 사이를 누비고 스노클링이나 다이빙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가지고 있다. 주요 코스는 뱀처럼 길게 늘어서 있는 스네이크 섬으로 가서 해수욕을 즐기고 인근 전망대에 올르는 하이킹을 즐긴다. 쿠둑눈 박쥐 동굴이라는 곳도 많이 가는데 원시 팔라완인들이 살았던 곳으로, 그들의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빅라군과 스몰라군은 가장 인기 있는 곳이다. 마치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해서 이 곳에서 카약을 타고 기암절벽 사이를 누비고 있으면 이곳이 바다 한 복판인가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든다.

 

스네이크 섬. 마치 뱀처럼 길쭉하게 모래사장이 나 있다.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고 싶지 않은 곳이 바로 엘니도다. 고급 리조트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좀 더 느긋하게 현지인들 속에서 엘니도를 즐기려면 일주일 정도 시간을 잡고 엘니도 마을에 작은 방갈로를 빌려 인터넷과 전화는 잠시 꺼 둔 후에 유유자적해 보는 것을 어떨까 싶다. 전혀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은, 100% 휴양이 될 것이다.

 

가는 길

가장 쉬운 방법은 마닐라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가량 이동해서 엘니도 공항에서 내리는 것이다. 배낭여행자들은 팔라완섬의 푸에르토 프린세사 공항에서 내려 버스로 6시간 정도 이동해 엘니도 타운에 닿을 수 있다.


세번째 결혼을 했다…두집 살림을 차렸다 여성,결혼,임신

[토요판] 가족
성급했던 두번의 결혼과 이혼… 후회 없지만 행복도 없었다
다시 온 사랑, 주변의 시선…두 딸이 말했다 “엄마 용기내”

이영애(49)씨는 지난해 6월 결혼했다. 세번째 결혼이었다.

예상하듯,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나만 행복하면 되지 부끄러울 게 뭐람’ 하다가도 ‘오죽하면 세번이나 결혼을 하겠냐’는 수군거림이 신경쓰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한 여성 작가의 정치적 발언이 도마에 오르자 인터넷 검색창에 ‘○○○의 전남편들’이 연관 검색어로 뜨는 게 이 나라가 아니던가. 심지어 “세번째 결혼을 원하는 사람들도 상대방은 삼혼이 아니길 바라는 경우가 많다”는 게 결혼 정보업체 관계자들의 얘기다.

이씨의 첫번째 결혼 상대는 4살 차이 나는 교사였다. 고향 친지의 소개였다. “남자는 다른 것 없다. 성실하고 똑똑하면 그만이다.” 그 말 한마디에 떠밀리다시피 한 결혼이었다. 만난 지 딱 한 달 만, 24살 되던 해인 1987년의 일이다. 남편은 술을 지나치게 좋아했다. 신혼에도 밤 12시를 넘겨 들어오기 일쑤였고, 마셨다 하면 인사불성이었다. 그런 날이면 남편은 꺼이꺼이 울면서 새어머니에게 구박받았던 어린 시절 얘기를 하고 또 했다. 지나치리만큼 말수도 적었다. 쉬는 날에도 말없이 텔레비전만 봤다.

결혼 1년 만에 첫딸이, 3년 만에 둘째 딸이 태어났다. 아빠 없는 아이들로 키울 수는 없었다. 아이들만 보고 살겠노라 다짐했다. 남편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술에 취한 날이면 어김없이 울었다. ‘사랑한다’는 표현은커녕, 결혼기념일에도 형식적인 선물 한번 받아본 기억이 없다. 까짓, 그런 건 참을 수 있었다. 아이들에 대한 무관심은 견디기 힘들었다. ‘공부는 잘하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남편은 아이들에 대해 묻는 법이 없었다. 우울증이 깊어져 병원까지 드나들었다. 그 무렵 남편은 도박에 손을 댔다. 10원도 가져다주지 않는 생활이 계속됐다. 차라리 애들 키우며 혼자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19년간의 결혼이 그렇게 끝났다.

“날아갈 것처럼 시원했다.” 이혼 뒤 느낀 솔직한 감정이다. 두 아이랑 먹고살기 위해 옷가게를 차렸다.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꼬박 12시간을 옷먼지 속에 파묻혀 살았다. 이혼을 후회하진 않았지만 ‘외로움’은 어쩌지 못했다. 아이들이 집을 비운 날,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듯 어두운 집으로 걸어들어가는 쓸쓸함이 싫었다.

그 무렵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났다. “아내의 외도로 이혼을 했다”는 그는, 느낌이 좋은 사람이었다. 전남편과는 달리 술은커녕 담배도 멀리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아이들에게만 자상한 아빠가 돼 준다면 더 바랄 것도 없다고 여겼다. 서두르는 그 남자와 혼인신고를 했다. 행복은 몇달 가지 못했다. 그는 출근한 직후부터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댔다. ‘어디냐’, ‘누구와 함께 있냐’는 질문과 의심이 끝없이 이어졌다. 전부인의 외도에서 받은 상처에서 미처 벗어나지도 못한 것이다. 알고 봤더니 부인과의 관계도 모두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두번째 결혼도 이렇게 끝났다. 다시는 결혼을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또다시 불면의 밤이 찾아왔다. ‘2번의 실패, 남들 말처럼 내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건 아닐까.’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매일 술만 마시던 첫번째 남편에 대한 연민도 생겨났다.

가슴속 불길이 잦아들 무렵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다섯살 연상의 그도 2번의 상처를 경험한 사람이었다. 사사건건 따져 묻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데 지쳐 전부인들과 이혼했다고 했다. “혼자서 아이들을 참 잘 키웠다”는 별것도 아닌 그의 말에 고마움이 밀려왔다. “또다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겠다”는 청혼도 든든했다.


1년을 망설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딸들이었다. “엄마, 이혼 뒤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지켜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젠 엄마도 좋은 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부모의 이혼 뒤 비뚤어지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아이들은 어느새 이렇게 자라 있었다. 세번째 새 출발에 용기를 냈다.

서둘지는 않기로 했다. 그에게도 장성한 1남1녀가 있었다. 성인이 된 아이들더러 부모가 결혼했으니 무조건 가족이 되자고 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두 집 살림’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한 뒤 살림을 합치기로 한 것이다.

두 집을 오가는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내 얘기에 귀기울여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 반주를 곁들인 저녁식탁에서 주고받는 소소한 대화가 이렇게 큰 기쁨이란 걸 새삼 깨닫고 있다. 남편에게 맞추다 보니 못 마시던 소주도 이젠 2~3잔은 비울 수 있게 됐다. “오늘은 회식이 있어 늦을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먼저 얘기해주는 것도 참 고맙다. 늦는다고 굳이 꼬치꼬치 따져 묻기보다, 그의 말을 믿어주겠다고 다짐한다. ‘사랑한다’는 말이 낯선 이씨와는 달리 남편은 표현에도 적극적이다. “사랑 표현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그를 위해 요즘은 문자메시지로라도 사랑 표현을 하려고 한다.

이제 고작 결혼 7개월 차. 허니문의 단꿈이 지나고 나면 갈등과 권태가 찾아올 수도 있다는 걸 그도 잘 안다. 중요한 건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는 점이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대화를 통해 풀어갈 작정”이다. 어차피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인 게 결혼 아닌가. “망설이고 있다면 용기를 내라. 누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진 않는다.” 그가 굳이 실명으로 인터뷰에 응한 까닭이다.

글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취재 및 촬영협조: 행복출발 더원, 듀오, 반조애

짝짓기 베테랑 백순영 커플매니저에게 들어봤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삼혼자의 수는 얼마나 될까?

정답은 ‘며느리도 모른다.’ 2010년 전체 결혼 가운데 재혼의 비율은 21.86%(통계청). 이 가운데 삼혼(혹은 이상)의 비율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삼혼자 비율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할 만큼 많다고 여기지 않아 따로 조사하지 않는다”는 게 통계청 관계자의 답변이다. 결혼 정보업체 듀오의 백순영 팀장도 “삼혼을 희망하는 고객은 아직까지는 그리 많지 않다”고 얘기한다. “사회의 부정적인 편견과 오해 때문에 굳이 삼혼이라고 밝히지 않거나, 혼인신고조차 하지 않는 이들도 많다”는 말도 덧붙였다.

삼혼자들에게 따라붙는 ‘유별나고 이해심 부족한 사람’이라는 편견은 타당할까? 사람 나름이다. 분명한 건 처음부터 이혼을 작정하고 결혼하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백 팀장은 “되레 세번째 결혼을 희망하는 이들 가운데는 행복한 삶의 기준을 조건보다는 가정과 사랑에 두고 있는 이들이 많다”고 전했다.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 재혼(두번째 결혼) 희망자들 상당수는 전 배우자보다 외모나 ‘스펙’이 나은 사람을 찾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재혼을 통해 실패를 만회하고자 하는 ‘보상심리’ 때문”이란 게 백 팀장의 설명이다. 하지만 “새로운 결혼으로 상처를 덮겠다는 생각은 또다른 실패를 부르는 지름길”이다. 실패를 피하기 위해선 “누구의 잘못으로 이혼을 했든 새 사람을 만나기 전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고 그는 조언한다.

삼혼의 경우, 특히 가족의 지지가 성공의 필수적 요건이다. 당사자들이 서로 마음에 들어하는데도, ‘또 한 번의 실패’를 염려한 가족들의 만류로 삼혼이 성사되지 않는 경우가 꽤 있다는 게 백 팀장의 얘기다.


한반도 분할·직할통치.中·日, 420년 전에 이미 노렸다(왕과정치가의 무능) 역사,문화,인문

올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7주갑(周甲·1주갑은 60년)이 된다. 돌이켜보면 ‘壬(임)’년에는 좋지 않은 일이 많이 일어났다. 고려가 멸망한 임신년(1392), 임진왜란이 일어난 임진년(1592),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년(1762), 임오군란이 일어난 임오년(1882)이 그러하다.

1. 임진왜란의 경험
1592년(선조 25년) 4월 1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만군을 보내 조선을 침략했다.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빌려 달라는 것(征明假道)”이 명분이었다. 조선이 용인할 리 없다. 조선은 이 사실을 명에 보고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오랑캐들끼리 싸우게 놔두자고 하면서 구원병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이에 왜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20여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전투다운 전투도 없었다. 최후의 방어선인 문경새재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내주었고, 명장 신립도 충주에서 반나절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싸울 만한 군사도 없었고, 군사 정보도 없었다. 선조가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안 것은 왜군이 상륙한 후 나흘 뒤였고, 신립도 적이 10리 앞에 접근해 올 때까지 몰랐다고 한다. 조선군은 지휘체계가 서지 않아 도원수, 순찰사, 순변사, 병사, 수사 등 명령이 여러 갈래에서 나왔고, 왜군을 보기도 전에 산골짜기로 도망갔다. 왜군이 칼 잘 쓰고 조총까지 가진 세계 최정예의 군대였으니 무리가 아니다.

서울을 사수한다던 약속을 저버리고 선조는 피란을 갔다. 고분고분하던 백성들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노비문서를 불태운다고 궁궐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는 선조에게 돌팔매질을 했다. 백성은 착취의 대상이었지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조를 따르는 조신(朝臣)들도 다 도망가고 몇몇만 따라가는 초라한 행색이었다. 그렇게 임금은 고려의 서울이었던 개성을 거쳐 평양까지 이르렀다. 왜군의 선발대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뒤를 바짝 추격해 평양을 함락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선조와 이항복은 의주로 갔다가 여차하면 명나라로 내부(內附)하자고 하고, 윤두수는 함경도로 가야 한다고 했다. 도체찰사 유성룡이 의주에서 명나라로 건너가자는 데 반대했다. 임금이 한 발짝이라도 우리 땅을 떠나면 조선은 조선이 아니라고 했다. 왕이 없으면 구심점이 없어져 백성들이 돌아설 것이고, 명나라가 도우려야 도울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망명정부도 불가능하다. 도망만 다니는 조선군을 믿을 수 없었던 선조는 끝까지 명에 의존하고자 했다. 뒤에 왕 자리만 보장해 준다면 국권까지 포기하려고 한 왕이 아닌가? 유성룡은 동북의 여러 고을이 아직 건재하고, 충의에 찬 의병이 며칠 안에 벌떼처럼 들고일어날 것이라고 희망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록 어디로 갈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유성룡은 함경도로 가는 것도 반대했다. 함경도로 갔다가 길이 막히면 명군과의 연락이 끊기고 강경파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사로잡히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선조가 평안도 숙천에 이르러 어디로 갈 것인가를 의논하는 그 순간, 함경도가 몽땅 가토에게 점령되어 두 왕자가 포로가 되었다. 함경도로 갔으면 왕이 생포되어 나라가 망했을 것이다. 선조는 의주로 가 이덕형을 보내 부랴부랴 명의 지원군을 요청했다. 유성룡은 시간이 없으니 빨리 구원병을 보내지 않으면 조선군이 몽땅 왜군이 되어 요동으로 쳐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명도 가뜩이나 몽골, 여진족과 싸우느라 지쳐 있는데 일본이 요동으로 쳐들어오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니까. 명의 입장에서는 군사를 보내 조선에서 싸우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7월 19일 조승훈(祖承訓)에게 5000군을 보냈으나 적을 가볍게 여기다가 패배해 돌아갔다.

사태를 심각하게 여긴 명은 다시 이여송(李如松)에게 4만5000군을 주어 이원익의 조선군 8000과 함께 평양전투에서 왜군을 격파했다. 처음이요 마지막 승전이었다. 승전한 이여송은 황제에게 승전보를 올리는 것으로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겼다. 유성룡이 아무리 패주하는 왜군을 추격하자고 해도 움직이지 않다가 벽제전투에서 패전한 후 평양으로 다시 후퇴했다. 심유경(沈惟敬)을 보내 고니시 유키나가와 휴전회담을 계속했다. 휴전회담에 조선은 끼워 주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우리는 그 회담에서 강자들이 조선을 분할하려는 음모가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유성룡이 계속 남진을 주장하고 휴전회담을 반대한 것도 조선이 분단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명군은 조선군이 왜군을 공격하거나 왜군을 죽이는 것도 금지했다. 이로 보면 임진왜란은 명일(明日)전쟁이다. 조선군의 역할은 군량을 공급하는 것뿐이다. 예외가 있다면 해전은 이순신의 분전 때문에 조일(朝日)전쟁이었다.

심유경은 평양 점령 2개월 후인 9월 1일 평양 북쪽 10리 밖 강복산 밑에서 고니시와 휴전회담을 개최했다. 이때까지 4개월간 고니시가 의주로 진격하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 진격했으면 선조와 조신들이 생포되어 나라가 망했을 것이다. 이에 앞서 이순신이 남해안에서 일본 해군을 격멸한 것도 다행이었다. 유성룡은 고니시가 의주로 진격하지 않은 것을 “하늘의 도움”이라고 했다. 2차 휴전회담은 용산에서 열렸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 강화사절의 일본 파견을 요구했다. 그리고 진주성싸움 이후에 3차회담에서 △황제의 딸을 후비로 줄 것 △8도 중 4도와 수도는 조선에 돌려줄 것 △포로가 된 두 왕자(순화군·의화군)는 돌려보내되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낼 것 등을 요구했다. 한강 이남 4도를 할양하라는 것이었다. 이 회담이 결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의 책봉사가 “히데요시가 책봉을 받고 사은했다”고 거짓 보고했다.

회담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 2월 14만5000의 병력으로 조선을 재침했다. 정유재란이다. 그가 죽자 전쟁은 끝났다. 이 전쟁으로 조선은 국토가 초토화되고 사상자를 많이 내기는 했으나 한 뼘의 땅도 잃지 않고 평화를 되찾았다. 다만 명군의 행패와 분할통치론, 직할통치론으로 시달렸다. 8년간 2000만냥의 전비를 쏟아부은 명은 망하고 조선은 여전히 친명파가 정권을 유지하다가 한말에 똑같은 일본군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2. 조선분할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 조선을 침공했는가? 그는 오랫동안의 전국시대 쟁패에서 일본을 통일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무장들이 양산되었다. 이는 히데요시의 정복욕을 자극했다. 이 훈련된 무장들을 조선, 명 정벌에 동원하면 일석이조이다. 문약한 조·명을 정벌해 영토를 넓히고 부하들에게 영지를 나누어줄 수 있고, 국내에 두면 골칫거리인 무장들을 정복전쟁에서 소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히데요시의 명이 조금만 길었다면 이 두 가지 숙원을 이루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스카와 히데노리(須川英德) 일본 요코하마국립대학 교수는 히데요시가 중국을 정복하면 천황을 북경으로 옮기고 자신은 동아시아·동남아시아의 중요한 무역항인 영파(寧波)로 옮겨 국제무역을 주도하려 했다고 한다. 명나라가 부패하고 몽골·여진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흥세력인 히데요시가 그런 야망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조·명의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다만 조선은 쉽게 차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만약 고니시가 의주까지 진격했거나, 선조가 함경도로 피란갔더라면 나라가 망했을 것이다. 또한 명·일의 사신이 각각 그 주군을 속이지 않았어도 조선은 분단되었다. 전쟁에 지친 명나라가 일본의 약간 무리한 요구라도 들어주었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더 가능성이 있었던 것은 심유경과 고니시의 휴전회담에서 조선의 하4도 할양이 관철됐더라면 조선은 분단되었을 것이다. 6·25가 아니고 이미 이때 한반도는 분단되었을 것이다. 명도 한강 이북만 차지해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이 되지 않도록만 하면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명일전쟁에서 각득기소(各得其所·각각 그 하고자 하는 바를 얻다)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사국인 조선만 손해를 보는 것이다. 강대국은 약소국을 위해 손해보지 않는다.

일본은 애초부터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지만 원병으로 온 명도 조선을 분할통치하거나 직할통치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금을 바꿀 생각도 했었다. 1593년 11월 명은 사신을 보내 조선의 사정을 면밀히 살피도록 했다. 더 이상 조선을 구해 줄 수 없으니 왕은 교체하고 사신으로 온 행인(行人) 사헌(司憲)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이에 사헌은 선조를 만날 때 스스로 남면(南面)하고 선조는 북면하게 했다. 모욕을 받은 선조는 사신에게 사표를 냈다. 유성룡은 평소 잘 아는 유격장군 척금(戚今)을 설득해 이를 무마했다. 유성룡은 백관을 인솔하고 사헌 앞에 서서 조선의 불행은 명을 치려는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다가 당한 것이라고 설파했다. 사헌이 납득했다. 선조의 유임도 인정했다. 그는 선조에게 유성룡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했다.

분할통치가 수그러들자 곧 직할통치론이 대두했다. 명이 막대한 전비를 보전해 주지 못한 왕에게 그 책임을 전가했다. 직할통치론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요동총독 손광이었다. 그는 조선의 군신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원나라의 정동행성(征東行省)처럼 명의 순무사가 조선의 군신을 행성에 소속시켜 직할하자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선조가 이를 받아들이려 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명군이 있어야 불측한 자들의 준동을 막을 수 있다는 데 있었다. 국가의 주권이 없어져도 자기의 왕권만 유지하면 된다는 심산이었다. 을사오적보다 더한 배신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에서는 형개(邢价)를 총독으로, 양호(楊鎬)를 경리로 파견했다. 급수가 시랑(侍郞)급에서 상서(尙書)급으로 오른 것이다. 양호는 부임하자마자 경리아문을 설치하고 조선의 병권을 장악했다. 선조와 대등한 위치에서 신료를 접견했다. 양호의 권한은 국정 전반에 미쳤다. 조선에 대한 직할통치가 사실상 시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1882년 임오군란부터 청일전쟁 때까지 원세계(袁世凱)가 국정을 천단한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1597년 12월에 양호는 울산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숨기다가 정응태(丁應泰)에게 탄핵되어 소환되었다. 선조는 그를 구원하기 위해 유성룡을 사신으로 보내고자 했다. 유성룡은 양호의 전횡을 미워해 가지 않았다. 이정구가 대신 갔다. 정응태는 조선이 왜군을 끌어들여 요동을 탈취해 옛 강토를 회복하려 하고, 감히 조(祖)니 종(宗)이니 하는 천자나 쓰는 묘호를 쓴다고 공격했다. 선조는 거적을 깔고 황제의 처분을 기다렸다. 유성룡은 주화오국(主和誤國·화의를 주도해 나라를 그르쳤다)의 죄목으로 이이첨과 성균관 유생들의 탄핵을 받고 삭탈관작되었다. 그날 이순신도 노량해전에서 순직했다. 왜일까? 선조는 말리는 체하면서 자기의 전패(戰敗) 책임을 유성룡에게 둘러씌워 쫓아냈다.

3.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한국의 주변에는 중국과 일본, 몽골과 여진·거란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는 무치주의, 정복전쟁이 유행해 서로 무력으로 다투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가 당에 망하자 살아남기 위해 신라는 중앙집권적 문치주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일본은 바다가 가로놓여서인지 무치주의를 계속했다. 고려·조선은 붓을 빠는 선비들이 지배하는 선비의 나라가 된 반면에 일본은 칼을 든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무사의 나라가 되었다. 이는 두 나라 역사가 크게 다르게 전개된 요인이다.

문치주의의 국가안보는 외교로 지켰다. 이른바 책봉체제(冊封體制)다. 중원을 차지한 중국은 천자의 나라가 되고 주변국가는 제후의 나라가 된다. 천자와 제후 간에는 주종(主從)관계가 이루어진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사대(事大)를 한다. 제후국은 해마다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고 조공(朝貢)을 바친다. 그 대신 천자는 제후국에 회사품(回賜品)을 준다. 이른바 조공무역이다. 이것으로 국가 간의 평화관계가 유지된다.
그러면 주변국끼리는 어떤 관계를 가졌나. 교린(交隣) 관계였다. 물론 서로 자기네가 소중화(小中華)라고 우기면서 갈등을 빚기는 했지만 보통 때는 그런대로 평화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 중 강대국이 생기면 균형이 깨져 전쟁이 벌어진다. 따라서 전쟁은 교린국 간에서만 일어났다.

문치주의 국가에서는 군사를 기르지 않는다. 군사를 기르려면 돈이 많이 들고 잘못하면 무인들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문약(文弱)에 흐르기 마련이다. 조선도 전형적인 문치주의 국가였으므로 문약했다. 농토도 적고, 인구도 적어 강군을 육성할 수 없었다. 더구나 사대교린으로 200년간 평화가 지속되어 국방의식이 희박했다. 돈을 받고 군역을 면제해 주다가 아예 국가에서 군포(軍布)를 받았다. 이러니 군사훈련, 무기준비, 정보체계가 제대로 갖추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군사는 있으나 마나다.

반대로 일본은 무치주의 국가로 상공업을 장려하고 외국무역에 역점을 두었다. 군비를 갖추기 위해서이다. 왜구의 노략질이 돈을 가장 손쉽게 버는 방법이었다. 왜구는 노략질을 일삼지만 항상 실전경험을 할 수 있는 강점이 있었다. 거기다가 전국시대에 번주(藩主)들이 치열하게 싸웠으니 강군이 될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 칼과 성(城)이 발달한 것도 그 때문이다.

임진왜란은 이같은 선비와 무사의 싸움이다. 선비가 지게 마련이다. 문과 무는 치우쳐서는 안 된다. 조선은 문에 너무 치우쳤다. 그러니 강국이 쳐들어오면 위태롭다. 힘이 없으면 남의 나라에 업신여김을 당한다. 임란 때 명나라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조선은 꼼짝없이 망했다. 명·왜에 의한 반도분단, 명의 분할통치론, 직할통치론이 제기된 것도 힘이 없기 때문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친명정책으로 일관하다가 300년 뒤에 무기력하게 그 일본에 망하고 말았다.

유비무환이다. 지금도 북한을 놓고 중·미·일·러가 6자회담에서 대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의 경험을 귀감 삼아 군사력을 기르고 국방의식을 높여야 한다. 지난번 천안함 피격 때 전 국민이 무감각했다. 임란 전에 선조나 조신들이 일본이 쳐들어온다는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쳐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며 무사안일하게 있다가 낭패를 당한 것을 상기해 보자. 다행히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되었고, 문무가 균형잡힌 국가를 영위하고 있으니 그때보다는 유리하다. 다만 국민의 튼튼한 국방의식과 자주의식이 필요하다.


이성무 | 한국의 과거제도, 조선양반사회연구, 조선왕조사 등의 책을 쓴 조선시대사의 권위자다. 서울대에서 문학박사(한국사 전공) 학위를 받고 국민대 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원장, 하버드대 객원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연세대 용재석좌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남명학연구원장,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대한민국 학술원상, 세종문화상(학술부문) 등을 수상했다.


영국의 스코틀랜드에서 가볼만한 곳 해외

1. Old Town of Edinburgh

 

2. Neist Point Lighthouse

 

 

3. Glasgow Merchant City

 

 

 

4. Loch Ness

 

5. Dunnottar Islands

 

 

 

6. Beaches of the Outer Hebrides

 

 

 

7. Stetland Islands

 

 

 

8. Glan Coe

 

 

 

9. St.Kilda-The Cliffs of Hirta

 

 

10. Rannoch Moor

 

 

11. Heart of Neolithic Orkney

 

 

12. Speyside Whisky Distilleries

 

 

13. Firth of Clyde

 

 

14. Melrose Abbey

 

 

 

15. Forth Alvarez

       사진 정보 출처 : 지구촌365일


카리브해에 있는 (Vieques Island)에 비에케스섬에 세운 W Hotels Retreat & Spa 호텔 건축,인테리어

중앙아메리카 푸에르토리코의 동쪽 끝 카리브해에 있는 (Vieques Island)에

최근 새로운 모습의 호텔이 세워졌다.

화려한 색깔의 호텔 내부 인테리어 등이 해외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세계적인 호텔 체인인 Starwood Hotels & Resorts Worldwide社가 최근 비에케스섬에 세운

W Hotels Retreat & Spa 호텔을 소개했다.

화려한 색이 어우러진 인테리어는 디자이너 Patricia Urquiola가 설계했다.

카리브해의 전경을 바라보면서 자연을 만끽하는 꿈의 궁전 호텔로 손색이 없다.

잠시 아름다운 사진들을 즐감하십시요.

 

 

 

 

 

 

 

 

 

 

 

 

 

 

 

 자료출처 : (contemporist.com)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