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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 ) 고건축

프랑스 박물관장들이 선정, 2000 418일 발표한 인기 박물관 리스트에 따르면 루브르 박물관이 1, 오르세 박물관이 2, 로댕 박물관과 피카소 박물관이 공동 3위를 차지 했다. 파리에 위치한 박물관들이 상위 10위를 모두 차지했는데 지난해 관람객 수로는 루브르 박물관이 5265천명, 오르세 박물관이 260만명, 로댕 박물관과 피카소 박물 관이 50만명씩을 각각 기록했다

<루브르는 서구 미술의 상징>

예술의 도시 파리를 연상할 때면 언제나 그 기본적 상징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창작활동을 업으로 삼는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에게는 일종의 향수마저 느끼게 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 같은 루브르의 명성은 예술의 도시 파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왕정과 공화정의 변화무쌍한 역사적 전개과정 속에서도 꿋꿋이 지속된 프랑스의 미술정책이 오늘의 루브르를 이루어낸 것이다. 물론 그 정책의 바탕에는 프랑스 일반 국민들의 미술에 대한 애정이 크게 작용해 왔음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원래 루브르 궁은 중세 이후 많은 프랑스 국왕이 거성으로 삼았던 곳으로서 프랑스 혁명이나 파리 코뮌 등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현재는 건물의 대부분이 루브르 미술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으나 그 역사는 1200년에 국왕 필립 오귀스트가 이속에 성채를 축조한 데서 비롯된다. 왕은 여기에 각종 재화와 무기·고문서 등을 수장하였는데, 특히 프랑스와 1, 루이 13, 루이 14세가 수집해 놓은 방대한 양의 미술품은 그 중에서도 백미라 할 수 있겠다. 프랑스 혁명 4년 뒤인 1793년 국민의회가 그 수장품들을 공개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루브르는 정식 미술관으로 발족하게 되었고, 그 후에도 꾸준히 미술품 수집이 계속되어 오늘날과 같은 대() 미술관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역사적 변천과정과 더불어 루브르의 소장품도 들고 나는 변동이 있긴 했으나,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엄청난 수집량은 본질적으로 프랑스 절대왕정과 떨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맺고 있다. 당시 프랑스의 지배계급은 고도로 발달된 전제왕정에 힘입어 자국내의 문화 전반을 손쉽게 독점할 수 있었다. 따라서 문화재 및 예술품의 보존능력이 엄청나게 확대되어 유럽 각국은 물론 북아프리카 지방의 예술품까지도 다량으로 획득, 잠재적 문화역량을 풍부하게 한 것이다. 이 잠재역량은 왕정이 붕괴되면서 공화정 및 제정의 여러 격변기를 거쳐 시민생활의 일상적 문화현상으로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결국 그 만개한 예술적 향취를 탐한 유럽제국의 예술가들이 파리를 제 2의 고향으로 삼아 그들의 창작활동을 꽃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루브르의 역사>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인 루브르 박물관은 그 소장작품 숫자만 치더라도 약 40만점으로써 한 작품에 1분씩 할애해 관람한다 해도 4개월을 꼬박 보내야만 한다고 한다. 루브르의 역사는 16세기 초 프랑스와 1세 때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비롯해 티치아노의 작품 12점 등의 이태리 거장들의 작품과 고대 조각 작품들을 보관하면서 시작되었다. 루이 13세 때는 이미200여 점의 작품이 보관되어 있었고 루이 14세 때는 1648년 창설된 회화, 조각, 아카데미의 전시회가 매년 열리면서 1710년에는 약 2500점이 소장되었다. 이 시대에는 프랑스가 고전주의 미술의 꽃을 피워 이태리의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쇠퇴해질 무렵이었다. 1725년부터 아카데미 주도하의 전시회는 살롱카페에서 있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살롱전'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리고 1768년 루브르를 박물관으로 개방하려는 1차 계획이 세워지고 1763년 혁명정부에 의해 실현되었다.

나폴레옹 시절에는 패전국으로부터 약탈해온 미술품들로 루브르를 메꾸어 그 당시 루브르는 세계 제1의 미술관이 되었다. 그 후 샤를르 10세왕 때 전시관이 세분화되면서 이집트와 그리스 미술품 전시관이 개관되었고 루이 필립 왕 때 앗시리아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최초의 루브르는 1200년 필립 오귀스트 왕 때 파리의 수호 성곽으로 루브르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장소는 현 루브르의 맨 동쪽에 자리잡고 있고 1988년 발굴 작업이 끝나 슐리(Sully)관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원형 모습을 볼 수 있다. 14세기에 들어와서 샤를르 5세는 루브르 왕궁을 옮기면서 왕실과 인연이 시작되어 1628년 루이 14세가 왕궁을 베르사이유로 옮기면서 끝났다. 오늘날의 루브르가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와 1세 때로서 재정난으로 인해 파리 시민들의 협조가 필요해지자 루브르로 왕궁을 옮기게 된 것이다. 이 때 건축가 피에로 레스코에 의해 1546년 착공한 공사는 앙리 2세를 거쳐 서서히 현재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혁명 때 소실된 툴르리 궁은 앙리 2세가 투르넬 궁에서 사망하자 루브르로 왕궁을 옮긴 카트린느 메디치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건축가 들로르므의 계획 아래 두 궁을 연결시키는 통로 공사가 진행되었으나 종교 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다. 그후 건축에 심미안을 가지고 있는 앙리 4세는 세느강변쪽의 날개에 해당하는 곳에 파피용 드 플로르를 건설하였다. 이곳과 루브르가 연결되는 통로 건물도 한 때 왕립 조폐소와 인쇄소가 자리잡고 있었고 루브르 궁 건설에 참여한 예술가들의 아틀리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루브르의 동쪽편을 장식하는 대열주는 1667년부터 1673년까지는 클로드 패로에 의해 건설되었다. 견고성을 높이기 위해 철근 구조로 제작된 이 대열주는 1964년 앙드레 말로의 제안에 따라 17세기에 계획된 원래의 설계도처럼 깊이 7m의 참호를 만들어 루브르의 웅장함을 돋보이게 한다. 루브르 벽면들의 장식을 잘 살펴보면 왕들의 이름들이 약자로 새겨져 있는데 L자가 두 개가 겹쳐진 것과 B는 루이 14, K는 샤를르 9, H자는 앙리 4, LA자는 루이 13세이다.

<루브르의 상징인 유리 피라미드>

루브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유리의 피라미드이다. 이 기념물은 1981년 계획된 루브르 전체 건물을 박물관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미테랑 대통령의 대 루브르 계획안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 1983년에 착공해서 1989년에 완공된 유리의 피라미드는 박물관의 일반인 출입구로써 내부 유적 발굴과 전체 보수비를 포함해서 20억 프랑이 투자되었다고 한다. 이 기념물은 현대 감각의 가벼운 건축 양식으로써 중국계 미국인인 아이오밍 페이의 작품으로 툴르리 공원과 베르사이유 공원을 설계한 정원사 르 노트르의 '풍경적 정원'의 개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 하였다고 한다. 초기에는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 준공은 루브르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내부에 들어가면 나선형의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지하 관장에 도착하게 되는데, 세느강과 인접한 이 광장은 입장권 판매와 안내창구가 자리잡고 있으며 안내를 위한 부대시설로 회의실, 서점, 카페, 2개의 식당이 자리잡고 있다. 지하에는 세 개의 입구가 조그만 유리의 피라미드의 자연 조명에 의해 드러나는데 각각 입구마다 고유 이름이 표기되어 있으며 슐리(Sully)관이 루브르 박물관의 일반적인 입구이다. 그 외에도 드농(Denon), 단체 관람객의 출입구로만 사용되고 있는 리슐리외(Rechelieu)관이 있다. 이 지하 광장에서 중앙의 유리의 피라미드를 올려다 보면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 더 웅장하게 보이며 실제규모는 길이 220m, 110m이다. 높이는 루브르의 2층 높이(20m) 3(24m)의 중간인 12.60m이며 그 기울기는 이집트의 기자(Chiza) 피라미드의 각도인 50.70도를 취하고 있다. 피라미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유리는 생-고뱅 회사에서 제작했고 순수 수정과 같은 맑은 투명도를 갖도록 영국에서 표면을 처리하였다.


COLOSSEO 콜로세움 고건축


로마의 세력이 광대해지자 로마의 지배층은 정복지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세금으로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는 한편 많은 노예들을 사들여 대규모의 농장을 직접 경영하게 되었다.

반면 병사로 참전했던 중소자영 농민들은 전사하거나 불구가 되었고, 고향에 돌아 왔어도 토지는 황페해져 있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농장에 고용되어 일하거나 토지를 부자(지배층)에게 팔고 로마(도시)로 가 로마시민으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는 "프로레타리아"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무산계급을 뜻하는 "프로레타리아"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병농일치의 원칙으로 유지했던 로마군제는 변질되었고, 로마에 몰려든 몰락 농민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인을 지지하는 폭력집단이 되기도 하였다.

정치가들은 이들을 무마하고 계속 인기를 끌기 위해 "빵과 쑈"를 제공해야 했다. 쑈 중 제일 인기를 끌었던 것은 검투사가 서로 경기를 하는 경기였다. 때론 맹수와 싸우게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기를 위한 경기장이 콜로세움이었다.

플라비앙(Flaviens)가의 베스파시아누스(Vespasien)황제가 군중의 오락을 위해 BC72년 공사를 시작하여 BC 80년 티투스(Titus)황제에 의해 봉헌되었다. 네로(Neron) 황제 영지의 호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로마의 계단식 극장 중에 가장 크게 지어졌다. 그리스의 극장을 확장시킨 타원형 투기장으로 경사가 급한 관람석으로 둘러 싸여 있다. 이것은 확성 장치 없이 소리를 전달하는데 유용하였다.


정식 이름은 플라비앙(Flaviens) 계단식 극장이나 이탈리아어로는 거대한 의미를 포함하는 콜로세(Colossee)라 불리기도 한다. 아마도 네로(Neron)의 거대한(colossale) 동상이 옆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콜로세움(Colosseum)"이라 불리는 것도 거대한(colossale) 규모로 지어졌기 때문에 사용된 용어이다. 콜로세움은 527m의 둘레와 57m의 높이로 대 로마 제국의 위엄성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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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Colosseum)의 구성은 아치(Archi)와 볼트(Vault)가 연결되어 3개의 층의 아케이트로 이루어 져있다.

일층은 도릭 오더(DORIC ORDER) 이층은 이오닉 오더(IONIC ORDER) 삼층은 코린티안 오더(CORINTHIAN ORDER)로 리듬을 주고 있다. 이것은 시각적으로 두꺼우며 남성적인 강함이 나타나는 도릭 오더를 하부에 놓고 여성적인 곡선의 주두를 가지고 있는 이오니아 오더와 코린티안 오더를 그위에 놓아서 시각적 안정감을 줄려는 의도였다.

최상부의 코니스(Cornice)에 구멍을 뚫어 그곳에 장대를 꼽게 되어 있다. 이것으로 관중석 위에 아마포의 천막을 칠 수 있게 하여 빛과 비로 관람객들을 보호하였다. 현대의 경기장의 객석 지붕을 연상케 한다.바람으로 인해 자주 천막의 조작이 어려워져 미젠느(Misene)선단의 선원들에게 의뢰하기도 하였다.

구조는 벽돌을 쌓은 조적조와 일부 석재를 사용하였고 외부의 큰 블록 석재들은 건식 공법으로 그리스 건축에서처럼 거대한 철 못을 사용하여 구조체에 긴결시켰다. 이 철물들은 중세에 사람들이 훔쳐가 녹여서 무기를 만들거나 하여 현재 일부가 남아 있고 돌에 철 못이 박혀 있던 커다란 구멍들을 볼 수 있다.

석재들은 티볼리(Tivoli)근교의 알불라이(Albulae)에서 사각형의 모양으로 운반되었으며 특별히 운반을 위해 6m폭의 도로를 내었다. 아치로 형성된 출입문들은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관람객들은 각자의 동전(입장권)에 새겨진 번호로 그들의 문을 찾아 콜로세움으로 들어간다. 신중하게 연구된 미로와 회반죽으로 장식된 둥근 천장(교차볼트 ; Groin Vault)과 계단을 통하여 그들의 자리로 찾아 들어간다.

내부 들어가 보기
평면은 달걀모양의 타원형으로 장축은 188m이고 단축은 156m이다. 단축 끝 부분의 북쪽에 황제의 관람석이 있으며 남쪽으로 지방총독과 집정관들이 위치한다.
투기장의 4m위부터 관중석이 시작되며, 먼저 귀빈들을 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의자들이 놓여 있고 난간으로 보호되고 있다. 관람석은 세단으로 이어져 있으며 복도로 다른 구역과 구별되며 많은 관객들이 흐르듯이 기울어진 통로로 나뉘어 올라간다.

자리들은 각각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분배가 된다.
맨 위층의 열주로 지지되는 테라스의 밑에는 여자들이 앉는다. 테라스 위에 노예들은 서 있다가 경기에 참가한다. 총 관중은 약 45000명의 좌석과 5000명의 입석으로 입장시킨다.
검투사들은 장축의 끝의 문에서 나와 군이 같이 열을 지어 주홍빛과 금으로 장식된 투기장을 돌아 황제의 앞에 멈춘다. 그들은 손을 들고 선언한다."Ave, Imperrator, morituri te salutant !"-"만수무강(萬壽無疆) 황제여, 목숨을 바쳐 충성을. 경의를 표하며!"
투기장으로 경기가 이루어지던 평평한 판이 사라지고 이것이 다시 발굴되었을 때 바닥의 홈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맹수들과 검투사들이 있었으며 평평한 무대장치를 기울어지게 하거나 작동하여 맹수들을 올라오게 했다. 이것은 관중에게 보다 극적인 흥미를 주기 위해서였다.



로마 PANTHEON 고건축

PANTHEON 판테옹

“판테옹은 우리에게 남아있는 가장 완벽한 로마의 건축이다.” 프랑스의 소설가들은 자주 그들의 글에서 이렇게 칭송한다.

판테옹은 처음, B.C 27년 아그리파(Agrippa)에 의해 모든(Pan) 신(Theon)들을 위한 신전으로 남쪽을 향해 건설되었다. 그 후 A.D 80년에 화제로 훼손되었으나 도미티앙(Domitien) 황제에 의해 복원되었다.

그 다음 하드리안(Hadrien ; 117-139) 황제에 와서 지금 상태처럼 북쪽을 향하여 재건되었다. 4세기에 들어서는 기독교 왕들에 의해 문을 닫게되는데 다른 장소와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와 이방인들에 의한 약탈이 행하여 졌기 때문이다. 608년 비잔스(Byzance) 황제로부터 보니파스(Boniface)교황이 선물로 받아 폐허가 되는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 후 성(聖) 마리아를 주보로 모시는 교회로 변신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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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테옹은 다른 어떤 건축물보다도 기념비적이다. 논리적으로 조합한 하나의 본체로 가지각색의 성향들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이것은 드물게 남아 있는 로마 건축중 하나로 다행히 그 당시 건축자의 처음의도 형태로 지금까지 우리에게 이르고 있다. 변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외부에서 오는 장소성이다. 즉, 그곳은 외부의 영향을 최소로 주었다. 오늘날 거리에서 우리는 열주로 된 포오치의 지각과 거대한 돔의 매스를 거의 비슷하게 느낀다. 그러나 로마시대에는 현재 헐어져 없어진 다른 건물들에 의해 거의 가려져 있었다.

정면에서 보이는 포오치의 페디먼트(Pediment : 코니스와 경사지붕의 단부에 의해 형성된 삼각형 공간)로 정면성을 나타낸다. 페디먼트는 12m의 높이의 이집트산 화강암으로 만든 8개의 기둥으로 바치며, 주랑으로 둘러싸여져 웅장하게 세워져 있다. 왼쪽 끝의 3개의 기둥이 유난히 낡았는데 이것은 우르밴(Urbain) 8세와 알렉산드르(Alexandre) 7세 때 세운 것이다. 교황의 문장(Barberini의 꿀벌과 Chigi의 별들)들이 주두에 나타나 있다. 페디먼트가 있는 포오치는 결국 관습들과 규범에 의해 필요로 만들어 진 것이다. 로툰다(Rotunda : 원형평면의 건물)을 완전히 가리지 않았지만 사실상 뒤로 물러나게 했다. 로툰다로 깊이 스며들며 입구를 느끼면서 연출된 정면의 장을 모두 바뀐다. 신전의 성소 개념만으로, 단순한 직사각형 상자 또는 원통형보다 더욱 진보된 형태로 그리고 단단하고 엄격히 둘러싸인 그 자체로 혁신적인 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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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툰다의 첫 번째 충격은 격자로 파여진 볼트(Vault : 둥근 천정, 궁륭)가 공중에 올려 있는 것이다. 채광은 둥근 창을 통하여 빛이 가득 차게 한다. 더욱 굉장한 건축적 경험들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돔의 중심으로부터 돔을 처리하는 바이아(Baia)의 로툰다 처럼, 그리고 바로 전의 로마 동시대의 트라잔(Trajan) 욕장, 이런 전례의 것들이 있었지만 이런 압도적인 크기는 없었다. 이렇게 놀라게 하는 단순성도 없으며, 이런 위험 있는 개념도 없었다. 판테옹 내부 평면은 매우 단순하다. 이 건물의 문턱을 넘자 균형감과 장중한 평온을 맞이한다. “그의 아름다움이 스며들기 위하여 두 번 눈 깜짝할 순간이면 족하다.” 둥근 천장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과감성이 있다.

지름과 높이가 동일하게 43.30m(150 pieds)이다. 그의 무게는 아치로 나뉘어져 두꺼운 벽(두께 6m)과, 돌출 되어 교대로 니치(niche)가 있는 8개의 벽기둥으로 받는다. 28개의 격자무늬(coffer)들로 꾸며진 천장 중심에 유일하게 빛을 도입하는 큰 구멍이 있다. 니치는 반원형, 직사각형으로 교대로 들어가 있으며 이들 앞으로 하나의 돌로된 거대한 기둥들에 의해 바닥에서부터 리듬을 준다. 니치 사이에 돌출된 것은 신전에 장식하는 것과 같다. 삼각형과 아치형태로 연달아 있는 박공 지붕의 형태는 르네상스의 예술품의 대관저 창문들 위에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둥근 천장의 베이스와 코르니시 사이는 18세기에 연속 장식창과 사각 액자 형태를 만들어 공간을 완성하였다.

판테옹의 건축자

밖에서 보기에 3층으로 나뉘어 있어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두 개의 층을 이루고 있다.

이런 내부와 외부의 차이는 구조적으로 불가피하게 받아 들여 졌다. 돔의 균형은 무거운 하중을 요구했다. 이것은 둥근 접시와 비슷하게 통통해 보이는 외부 측면으로 설명되어진다. 분명히 내부 둥근 천정의 부산물일 것이다. 성 베드로 성당(1590년 높이 42m)보다 조금 더 큰 돔의 건설은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기술적으로 위험한 계획이었다. 이런 계획에서 건축자들을 그들의 재료와 그것을 다루는 그들의 능력을 완전히 신뢰해야 했다.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네 가지 특수한 기술적으로 요구되는 요인이 있었다.

첫째로,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은 완벽하게 혼합된 모르타르의 내구성이다. 오규스트 쵸이시(Auguste choisy)는 “인공적인 거석(巨石)"이라 정의하며, 이 건축물은 완벽한 진수라 했다. 판테옹 건축자는 이 요소들을 그가 아는 한계까지 아니 그 이상으로 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두 번째 요인은 기초의 견고성이다. 팔라틴(Palatin)위의 라비리우스(Rabirius)의 공사 부분은 이미 함몰의 위험을 보였기에 하드리안 왕제 통치하에서 견고하게 강화되었다. 판테옹의 건축자는 똑같은 실수를 피하기로 작심했다. 원형의 평면을 고리모양의 콘크리트 토대를 만들어 위에 올려놓았다. 이 토대는 7.3m의 기초로 4.5m 깊이로 들어가게 했다. 건설하면서 다른 고리를 외부와 동심을 그리며 한단씩 기초에 첨가했다.

세 번째, Caemenata와 집성체 그리고 분쇄에 대한 저항과 밀도를 선별하여 분류하는 것은 훌륭한 구조의 내구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기초들을 위한 석회화(石灰華), 내부 원통을 위한 응회암(凝灰岩)과 석회암이 교대로 이루어진 층, 돔의 격자무늬가 있는 맨 처음 부분과 두 번째 층은 응회암 단독으로, 세 번째 격자무늬 고리는 기와와 응회암 테두리에 일치한다. 그 선 위로는 경량의 노란색 응회암과 경석(輕石)만 있다. 단일 면적으로 볼트의 꼭대기의 하중은 기초의 2/3이다.

네 번째 마지막 요소로는 내부 둥근 천장에 세심하게 격자로 파여 있는 것이다. 이렇게 파여 있음으로 엄청난 콘크리트 매스의 중심의 건조를 유발시킨다. 특히 건설하는 동안 이것들은 입구와 분산되어 내부의 장식적 중요 연결장치로 구성되어 있는 일곱 조각의 기둥들에 하중을 경감시켰다. 이 조각 기둥들은 원통의 외부에서 벽돌을 사용하여 만든 거대한 보조 아치로 도움을 받았다.

* 보조아치 : 보조아치는 주로 기와들과 수평으로 잇는데 사용되었다. 판테옹의 외부 콘크리트 벽돌 공사의 표면이 실제 구조와 맞지 않아 보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벽돌조 보조아치는 출입구, 창문 그리고 그러한 개부들에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빈 공간의 바로 위에서 하중을 분배하기 위하여 규칙적으로 배열된 이들 보조아치들로 인하여 “살아있는” 건축이라는 인상을 준다. 건축자는 벽돌의 표면들을 이용하여 창과 문들에 수직으로 정확히 나란히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아치의 밖에서 안으로 구축해 가면서 중심핵을 포함해 뼈대와 같이 벽돌로 외부처리를 한다. 이것은 정확히 고정시킬 수 있고 동시에 나무 거푸집에 하중을 적게 가하게 한다.

판테옹의 상징성

공동 온천용장과 같은 형태인 이 의심스러운 종교적 공간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 번째로, 판테옹은 보통의 신전과는 다름이 강조되어야 한다. 신의 동상이 안치된 직사각형의 장소, 내부의 넓은 곳은 중요한 회의의 장소로 제공된다. 이것은 고대예식과 발전된 예식을 함축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공간이 매우 독특한 특성들로 설명된다. 원형 평면, 내부 드럼(drum)은 원의 반지름에 해당되는 높이를 가졌다.

내부 지붕은 완전한 구를 이룬다. 내부 빈부분의 큐빅에 완전한 구를 포함시킬 수 있다. 큐빅 한 면의 길이는 반지름의 2배가된다. 바닦의 압시드부터 지붕 둥근 창까지 포함해서 정삼각형을 만들어 균형 잡힌 피라미드를 만든다. 모든 이 기하학적 건설은 기념비적으로 만든 피타고라스 학파의 개요인 수적 특성과 상징적 특성에게 고대인들로부터 고려되었다. 우리는 키케르(Ciceron)의 글을 생각한다. “당신은 원뿔형, 원통형, 피라미드형들이 구에서 나온 아름다운 형태라 주장한다. 만약 이 형태들이 가장 아름다웠다면 그것은 보일 때 만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형태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 전혀 꺼칠함이 없고, 딱딱함 없고, 전혀 각이 있지 않은 또한 구불구불함 없이, 튀어나온 것 들어간 것 없는 그것 하나로 이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이 무엇인가? 다른 어떤 것 보다 뛰어난 두 가지 형태가 있다. 3차원의 상태로는 구이고 평면으로는 원형 또는 괘도이다.”

판테옹의 내부의 모습에서 주목되어지는 비례와 평면의 상징성 그리고 내부 장식은 다른 것들과 구별이 된다. 상징과 비례들은 고전건축의 한정과 개념안에서 문학의 원천과 그자신의 기념비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종교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인 특성이 건물에 기념비적인 상징주의를 만들었다.

실제로, 본질적인 기하학은 우주 형태와 천공의 움직임이 항상 동반된다. 판테옹은 적절한 예가 된다. 실내에서, 7개의 압시드는 별의 일곱 신들을 위해 봉헌되었다. (5개의 행성과 두 개의 별 즉, 대양과 달) 반구 천장은 우주를 나타낸다.


빌라 데에스테 (Villa d’Este) 고건축

르네상스 시대의 정원의 걸작으로 꼽히는 <빌라 데스테>는 로마로부터 북동 쪽 25킬로미터 지점의 티볼리 지역에 위치해 있다.

조성배경

에스테(Este) 집안의 개인 별장으로 티볼리의 주지사로 임명된 추기경 이폴리토 에스테 (Ippolito d'Este )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는 1509년에 교황 알랙산더 6세의 아들 루크레치아와 알폰소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알랙산더 6세의 총애와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 또한 그것을 즐거워했다. 그는 매우 총명했고 현명한 외교적 능력으로 10살때 대주교가 되었고 30세에는 추기경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교황의 자리를 결국 줄리어스3세에게 빼았기고 그에 의해 티볼리의 주지사로 임명돼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미 매널리즘에 취한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티볼리의 주지사로 임명돼 오늘날 건축 조경사에 손꼽히는 초자연적 조경 양식을 만들어낸다. 이폴리토는 1550년에서 그가 사망한 1572년동안 당시의 최고건축가 pirro Ligorio와 수많은 예술가을 동원하여 가장 세련돼고 자연적이고 지극히 지성적인 하지만 불만에 가득찬 그는 그만의 실락원를 창조하였다. 데스테 장의 Pirro Ligorio 등은 사유적 세계를 추구하는 성향을 보이며 수많은 예술가들과 급속하게 이양식을 발전시켰고, 그의 정원 꾸미기는 자연에 대한 이해와 조화에 바탕을 두고 동양의 정원과 마찬가지로 정원 밖의 산 등 조형물을 조망 안으로 끌어들이는 사전의 치밀한 계산과 함께 사의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지형적.기후적 제약 조건에 따라 지형의 변화와 수량의 변화 수압의 변화에 기초를 두고 만들어졌다. 이렇게 조성된 데스테 정원은 넵튠의 분수(Fontana di Netuno), 원형의 분수(Fontana Dell'Ovato), 수압오르간, 백개의 분수, 용의 분수 등 수 많은 분수와 물이 있는 정원으로서 '물의 향연'이라는 어울리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배치도면

배치도면을 살펴보면, 빌다 데스테는 상당한 고저차를 보여준다. 주요건물은 주로 구릉위에 위치하고 있어 한눈에 정원과 주변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그러나 테라스의 단차와 단차사이에 수목을 밀식하여 일부분을 가리고 있어 정원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게끔 한다. 또한 주요 시각축을 개방하여 방문자의 시선과 발걸음을 유도하고 있다. 평면은 매우 대칭적으로 구분되어 수목이 식재되고 다양한 분수와 연못 등이 설치되어 엄격한 대칭미를 느낄 수가 없다.

물과 빛의 향연장

물과 빛의 신비로운 공간구성, 신비로운 감성의 이입은 정원의 소유주인 이폴리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그리 멀지않은 로마로의 회귀를 갈망했고 그리워했다. 그의 마음을 다양한 조각상과 분수의 분출로 은유적으로 이야기했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상상력으로 조성된 정원을 방문하려고 로마에서 방문객들이 줄을 잇는다. 다양한 분수를 살펴보면, 뜨거운 열탕의 증기압으로 42개 수관을 분출하는 용의 분수, 넵튠의 분수, 올빼미 분수 그리고 100개의 낙차식 분수로 된 물 오르간 등은 기술도 기술이려니와 그것을 착상해 낸 설계자의 그 신술같은 지혜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다. 혹 이 모든 분출되는 미의 형이상학이 이폴리테 자신의 갈망과 불만의 역사를 반영하는 듯하다. 이러한 데스테 장은 '대포와 소총이 어우러져 내는 물의 연주'라는 몽테뉴의 찬탄을 빌지 않더라도 따사로운 지중해 햇살 아래서의 향연을 스스로 만끽할 수 있다.

• 100 개의 분수 - 작은 분수로 이루어진 길과 심미안적인 측면에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오르간 분수등 거대한 하기도하고 잔잔하기도한 물의 향연이다. 이는 19세기에는 이곳에 머문 프란츠 리스트와 같은 유명한 작곡가에게 영감을 주었고 결국 그는 유명한 "빌라 데스테의물놀이"를 작곡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빌라 데스테에서 자연을 벗하며 물의 향연에 취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테라스 정원

크고 작은 분수들과 분천들 과 어울려져 있는 월계수, 가시나무 종려나무들의 향연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음악의 향연을 연출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기서 프라츠 리스트는 플라타너스와 종려나무 사잇길을 거닐며 여기저기 펼쳐진 물의향연을 노래했다. 따사로운 지중해 햇살에 비친 뜰은 산만하거나 호화롭지 않다.

빌라 데스테의 정원 곳곳의 테라스는 변화를 주기 위하여 모양이나 장식이 여러모로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화단으로만 이루어진 테라스 자갈만 깔려 있는 테라스 어느것 하나가 같은 것이 없다. 하지만 결코 산만하거나 호화롭지 않은 정리된 공간들이다.


외벽 _ 트리에스트에서 고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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