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박물관장들이 선정, 2000년 4월 18일 발표한 인기 박물관 리스트에 따르면 루브르 박물관이 1위, 오르세 박물관이 2위, 로댕 박물관과 피카소 박물관이 공동 3위를 차지 했다. 파리에 위치한 박물관들이 상위 10위를 모두 차지했는데 지난해 관람객 수로는 루브르 박물관이 526만5천명, 오르세 박물관이 260만명, 로댕 박물관과 피카소 박물 관이 50만명씩을 각각 기록했다-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_025_caf316.jpg?type=w3)
_033_caf316.jpg?type=w3)
_065_caf316.jpg?type=w3)
_067_caf316.jpg?type=w3)
_050_caf316.jpg?type=w3)
_087_caf316.jpg?type=w3)
<루브르는 서구 미술의 상징>
예술의 도시 파리를 연상할 때면 언제나 그 기본적 상징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창작활동을 업으로 삼는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에게는 일종의 향수마저 느끼게 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 같은 루브르의 명성은 예술의 도시 파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왕정과 공화정의 변화무쌍한 역사적 전개과정 속에서도 꿋꿋이 지속된 프랑스의 미술정책이 오늘의 루브르를 이루어낸 것이다. 물론 그 정책의 바탕에는 프랑스 일반 국민들의 미술에 대한 애정이 크게 작용해 왔음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원래 루브르 궁은 중세 이후 많은 프랑스 국왕이 거성으로 삼았던 곳으로서 프랑스 혁명이나 파리 코뮌 등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현재는 건물의 대부분이 루브르 미술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으나 그 역사는 1200년에 국왕 필립 오귀스트가 이속에 성채를 축조한 데서 비롯된다. 왕은 여기에 각종 재화와 무기·고문서 등을 수장하였는데, 특히 프랑스와 1세, 루이 13세, 루이 14세가 수집해 놓은 방대한 양의 미술품은 그 중에서도 백미라 할 수 있겠다. 프랑스 혁명 4년 뒤인 1793년 국민의회가 그 수장품들을 공개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루브르는 정식 미술관으로 발족하게 되었고, 그 후에도 꾸준히 미술품 수집이 계속되어 오늘날과 같은 대(大) 미술관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역사적 변천과정과 더불어 루브르의 소장품도 들고 나는 변동이 있긴 했으나,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엄청난 수집량은 본질적으로 프랑스 절대왕정과 떨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맺고 있다. 당시 프랑스의 지배계급은 고도로 발달된 전제왕정에 힘입어 자국내의 문화 전반을 손쉽게 독점할 수 있었다. 따라서 문화재 및 예술품의 보존능력이 엄청나게 확대되어 유럽 각국은 물론 북아프리카 지방의 예술품까지도 다량으로 획득, 잠재적 문화역량을 풍부하게 한 것이다. 이 잠재역량은 왕정이 붕괴되면서 공화정 및 제정의 여러 격변기를 거쳐 시민생활의 일상적 문화현상으로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결국 그 만개한 예술적 향취를 탐한 유럽제국의 예술가들이 파리를 제 2의 고향으로 삼아 그들의 창작활동을 꽃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루브르의 역사>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인 루브르 박물관은 그 소장작품 숫자만 치더라도 약 40만점으로써 한 작품에 1분씩 할애해 관람한다 해도 4개월을 꼬박 보내야만 한다고 한다. 루브르의 역사는 16세기 초 프랑스와 1세 때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비롯해 티치아노의 작품 12점 등의 이태리 거장들의 작품과 고대 조각 작품들을 보관하면서 시작되었다. 루이 13세 때는 이미200여 점의 작품이 보관되어 있었고 루이 14세 때는 1648년 창설된 회화, 조각, 아카데미의 전시회가 매년 열리면서 1710년에는 약 2500점이 소장되었다. 이 시대에는 프랑스가 고전주의 미술의 꽃을 피워 이태리의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쇠퇴해질 무렵이었다. 1725년부터 아카데미 주도하의 전시회는 살롱카페에서 있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살롱전'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리고 1768년 루브르를 박물관으로 개방하려는 1차 계획이 세워지고 1763년 혁명정부에 의해 실현되었다.


나폴레옹 시절에는 패전국으로부터 약탈해온 미술품들로 루브르를 메꾸어 그 당시 루브르는 세계 제1의 미술관이 되었다. 그 후 샤를르 10세왕 때 전시관이 세분화되면서 이집트와 그리스 미술품 전시관이 개관되었고 루이 필립 왕 때 앗시리아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최초의 루브르는 1200년 필립 오귀스트 왕 때 파리의 수호 성곽으로 루브르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장소는 현 루브르의 맨 동쪽에 자리잡고 있고 1988년 발굴 작업이 끝나 슐리(Sully)관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원형 모습을 볼 수 있다. 14세기에 들어와서 샤를르 5세는 루브르 왕궁을 옮기면서 왕실과 인연이 시작되어 1628년 루이 14세가 왕궁을 베르사이유로 옮기면서 끝났다. 오늘날의 루브르가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와 1세 때로서 재정난으로 인해 파리 시민들의 협조가 필요해지자 루브르로 왕궁을 옮기게 된 것이다. 이 때 건축가 피에로 레스코에 의해 1546년 착공한 공사는 앙리 2세를 거쳐 서서히 현재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혁명 때 소실된 툴르리 궁은 앙리 2세가 투르넬 궁에서 사망하자 루브르로 왕궁을 옮긴 카트린느 메디치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건축가 들로르므의 계획 아래 두 궁을 연결시키는 통로 공사가 진행되었으나 종교 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다. 그후 건축에 심미안을 가지고 있는 앙리 4세는 세느강변쪽의 날개에 해당하는 곳에 파피용 드 플로르를 건설하였다. 이곳과 루브르가 연결되는 통로 건물도 한 때 왕립 조폐소와 인쇄소가 자리잡고 있었고 루브르 궁 건설에 참여한 예술가들의 아틀리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루브르의 동쪽편을 장식하는 대열주는 1667년부터 1673년까지는 클로드 패로에 의해 건설되었다. 견고성을 높이기 위해 철근 구조로 제작된 이 대열주는 1964년 앙드레 말로의 제안에 따라 17세기에 계획된 원래의 설계도처럼 깊이 7m의 참호를 만들어 루브르의 웅장함을 돋보이게 한다. 루브르 벽면들의 장식을 잘 살펴보면 왕들의 이름들이 약자로 새겨져 있는데 L자가 두 개가 겹쳐진 것과 B는 루이 14세, K는 샤를르 9세, H자는 앙리 4세, LA자는 루이 13세이다.
_006_caf316.jpg?type=w3)
_016_caf316.jpg?type=w3)
<루브르의 상징인 유리 피라미드>
_003_caf316.jpg?type=w3)
_014_caf316.jpg?type=w3)
_043_caf316.jpg?type=w3)







_054_caf316.jpg?type=w3)






























































































































........

최근 덧글